한국의 역사공부

한국 위인 궁예 새로운 나라를 만들다

불고 또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바닐라 삼촌 2022. 11. 5.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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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 궁예 고려 건국의 과정 알아보자.

한국 위인 궁예는 신라의 승려였으나 신라가 몰락한 후 세력을 키워 898년 스스로 왕위에 오른 후고구려의 시조이다. 평안도와 한산주 의 30여 성을 공략하고 왕건을 시켜 양주 견주를 복속케 하는 등 한강유역 전체를 지배하고 나라를 세운 과정을 알아보자.

한국 위인 궁예 성장과정 알아보자.

한국 위인 궁예는 아버지 헌안왕과 궁녀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이다. 헌안왕이 아니라 경문왕의  아들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태어날 때 흰 빛이 지붕에 머물렀고, 날 때부터 이빨이 나 있어 상서롭지 않게 본 일관이 그를 제거하도록 조언하자, 왕이 신하를 시켜 궁예를 죽이라 했다. 신하가 성벽 높은 곳에서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던졌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유모가 아래에서 아이를 받다가 눈을 찔러 한 눈이 멀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궁예는 유모의 손에서 자라다가 세달사에 들어가 중이 되어 선종이라 이름했다.

한국 위인 궁예 나라를 세우는 과정 알아보자.

신라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듭하며 많은 영토를 차지하게 된 한국 위인 궁예는 갈수록 세력을 넓혔다. 이때 한강 이북의 30여 성이 모두 궁예의 차지가 되었다. 영토를 확장하며 자신감에 차 있던 궁예는 898년에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그 지역의 토호 세력인 왕륭과 그의 아들 왕건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래서 군사를 내주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하였다. 이들 역시 여러 성들을 공략해 궁예의 세력을 넓히는 데 한몫했다. 이때부터 궁예의 세력은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한국 위인 궁예의 영토는 지금의 강원도와 경기도, 황해도와 충청북도 지방까지 확대되었다. 이에 고무된 궁예는 901년에 국호를 후고구려라 정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후 궁예는 자신이 세운 나라의 이름을 904년에 마진으로 고치고, 이듬해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다. 궁예는 이곳에 크고 호화로운 궁궐과 누대를 지어 자신의 세를 과시했다. 이 과정에서 과도한 요역과 세금 징수로 민심이 이반 되기도 했다. 911년에는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고쳤다. 태봉이라는 국호는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 왕조를 세울 때까지 계속 쓰였다.

한국 위인 궁예 신앙을 알아보자.

한국 위인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구세주인 미륵불이 나타나 불교적 이상 세계를 만들 것이라는 종교적 믿음을 주려고 했다. 이러한 신앙이 유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 세계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국통일 이후 전쟁으로 피폐해진 신라 백성들 사이에 미륵 신앙이 유행했다. 특히 통일 신라 후기에는 잦은 왕위 쟁탈전과 지도층의 실정으로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미륵 신앙이 더욱 큰 힘을 발휘했다.

 

한국 위인 궁예는 이러한 종교적 이념을 현실 정치에 접목한 것이다. 자신이 신통력으로 여인들의 간통 사실을 알 수 있다면서 이를 빌미로 무고한 여인들에게 끔찍한 형벌을 가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의심이 많고 곧잘 성을 내어 주위의 여러 신하와 장수, 지방 관리와 평민까지 죄 없이 죽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궁예의 이러한 횡포는 결국 그의 부하인 왕건에게 역심을 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국 위인 궁예 역사적 평가 알아보자.

한국 위인 궁예의 성향이 진골귀족 중심의 골품제 사회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몰락하지 않았다면 누릴 수 있었을 특권과 권위를 회복하려는 남다른 집념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권력을 잡게 되자 점차 농민들의 고통을 어루만진다거나 권력을 남과 나눈다거나 하는 일에 인색하게 되었다고 본다.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동이 갖는 중요한 역사적 의의는 왕경의 골품 귀족에 대해 지방의 호족들이 승리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거니와, 궁예는 이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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