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공부

고려 외교관 한국 위인 서희 장군 활약 알아보기.

불고 또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바닐라 삼촌 2022. 10. 2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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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고 고려 외교관 한국 위인 서희 알아보자.

고려 태조 때 담판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고 영토 확장에 기여한 고려 초의 문신이자 고려 외교관 한국 위인 서희. 993년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송외교에 불안을 느낀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자 최량과 함께 적을 방어하며 고려의 북진정책이 역사적으로 타당함을 밝히고 중간에 위치한 여진족을 평정하자고 거란을 설득해 군사를 돌려보냈다. 그 결과 강동 6주에 성을 쌓아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지역을 다시 영토로 편입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내용을 알아보자.

고려 외교관 한국 위인 서희 성장배경 알아보자.

고려 외교관 한국 위인 서희는 942년(태조 25) 서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이천, 자는 염윤이다. 서희의 할아버지 서신일은 이천 지방의 토착 호족이었으나, 아버지가 광종 대에 내의령을 지내면서 그의 집안도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하게 되었다.《고려사》는 서희가 어릴 때부터 성질이 엄정하고 성실했다고 전한다. 학업에 정진해 960년(광종 11)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고 광평원외랑을 거쳐 내의시랑에 이르렀다.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워 장군이라 불리지만 본래는 문관 출신이다.

고려 외교관 한국 위인 서희 정치적 성향 알아보자.

광종 경종을 거치면서 개국공신 계열이 정치권에서 밀려나고 성종 때에 이르면 유교정치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는데, 이때 최지몽,최승로,최량 등의 신라 6두품 출신이 그 주류를 이루었고 성종대의 정책 결정에 이들의 영향은 매우 컸다. 이에 비해 서희는 같은 유학자였으며 과거 급제자였지만 지방 호족 출신으로서 그 계열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다. 거란의 침입 때 할지론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이지백과 함께 이를 반대한 것도 이러한 경향에서 비롯되었으며, 또 공빈령, 정우현이 봉사를 올려 시정을 논했을 때 성종이나 다른 재상들이 월직이라 하여 처벌하려 했으나, 고려 외교관 한국 위인 서희만은 누구나 간쟁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오히려 정우현의 논사가 적절한 것이었다고 옹호했다.

 

고려 외교관 한국 위인 서희 승리 방식 알아보자.

먼저 거란 진영에 도착한 고려 외교관 한국 위인 서희는 소손녕이 신하의 예로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여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대좌하도록 했다. 소손녕은 침입의 이유를 첫째,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는데도 거란이 소유하고 있는 고구려 땅을 침식하고 있으며, 둘째, 거란과 땅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을 하면 무사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고려 외교관 한국 위인 서희는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일 지계로 논한다면 요나라의 동경도 모두 우리 경내에 있는 셈이니 어찌 침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또 압록강 안팎도 우리 경내였는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에 도거하여 완악하고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의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을 통하지 못한 것은 여진 때문이니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아 성보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했다. 이는 고려의 북진정책이 역사적으로 타당함을 밝히고, 고려와 거란의 교빙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그 중간에 위치한 여진족의 평정이라는 선결조건을 공동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거란은 이러한 서희의 대답을 인정하고 군사를 돌이켰으며,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을 개척하는 데도 동의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고려 외교관 한국 위인 서희는 북진의 명분까지 얻었으니 명분과 실리 모두를 살린 한판승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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