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공부

한국 위인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 공부하자

불고 또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바닐라 삼촌 2022. 10. 26.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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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강감찬 장군 귀주대첩 고려 구한 과정 배워보자.

고려시대 강감창 장군은 귀주대첩으로 고려를 구했다. 고려 시대 거란의 수십만 대군을 맞아 귀주에서 섬멸한 귀주대첩을 이끈 장군이 바로 강감찬이다.강감찬은 흥화진과 귀주에서 뛰어난 전략과 기지로 거란군을 대파하고 승리했다. 고려는 안정을 되찾아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과정을 배워보자.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 거란 침략 이기다.

우리 역사에서 3대 대첩중 하나인 귀주대첩을 승리로 만든 장군이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이다.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사실 때문에 강감찬을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 강감찬은 문관이었다. 98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복시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오른 후 예부시랑 국자 제주 한림학사 승지 중추원사 이부상서를 역임했다. 1010년, 거란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두 번째로 고려를 침략했다. 우여곡절 끝에 등극한 현종은 전쟁에 미처 대비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고려군은 속수무책으로 패전을 거듭했다. 이때 강감찬은 장수로 나서지는 않았으나 왕에게 끝까지 항복하지 말 것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왕이 피신한 사이 다행히 양규가 무공을 크게 세워 거란을 물리쳤다. 그러나 거란은 1018년(현종 9)에 또다시 고려를 침략했다.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은 흥화진과 귀주에서 뛰어난 전략과 기지로 거란군을 대파하고 승리했다. 고려는 안정을 되찾아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 홍화진 전투 승리하다.

거란의 3차 침입이 시작되자 현종은 20만 대군을 이끌 상원수로 강감찬을 임명했다.고려 시대 강감찬 장군은 거란군을 맞아 곳곳에서 승전보를 울렸다. 특히 흥화진 전투에서 돋보이는 전략과 전술로 큰 승리를 이루었다. 산은 험하고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강이 흘렀다. 강감찬은 강민첨에게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강을 막고, 기병 1만 2천 명을 선발해 산중에 매복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거란군이 강에 이르러 건너기 시작하자 소가죽을 묶었던 밧줄을 끊어내고 일시에 강물을 흘려보냈다.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많은 거란군이 물에 휩쓸려 갔다. 또한 매복해 있던 고려군이 강물을 헤엄쳐 도망치는 거란군을 무찔렀다. 당시 70세였던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의 노련한 기지가 돋보이는 대승리였다.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 귀주대첩 승리하다.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은 흥화진에서 크게 패하고도 진군을 멈추지 않고 개경으로 향했다.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은 강민첨으로 하여금 거란군을 추격하게 했다. 강민첨은 자주 내구산에서 적을 크게 격파했다. 시랑 조원은 마탄에서 적을 습격해 1만여 명을 사살했다. 하지만 소배압은 굴하지 않고 군을 재정비해 1019년(현종 10) 정월에 다시 개경을 향해 진군했다. 강감찬은 미리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군대 1만 명을 주어 개경을 방어하도록 했다. 그리고 거란군의 개경 입성에 대비해 개경 근처의 작물을 미리 거두게 하고 백성들을 성 안으로 피난시켰다. 먼 길을 진군한 거란군이 개경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게다가 마을이 비어 군량미를 구할 수가 없자 소배압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이 노린 것은 바로 회군하는 거란군이었다. 거란군의 퇴로 곳곳에 군을 매복시켜 두었다가 급습했다. 마침내 귀주에서 거란군과 고려군이 전면적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귀주는 압록강 이남 청천강 이북에 있는 강동 6주의 하나였다. 뒤쫓는 고려군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지만, 거란군 역시 물러날 길 없는 막판 전투였다. 그렇기 때문에 양 군의 대치는 쉽사리 승부를 보지 못한 채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김종현의 부대가 도착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또 때마침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어 닥쳤다. 남쪽에 진을 친 고려군이 기세를 올려 맹렬히 공격하니 거란군은 정신없이 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은 추격을 명했다. 그리하여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는 중간에 적들의 시체가 들에 널렸다. 생포한 인원과 노획한 말, 낙타, 갑옷과 투구 같은 병기들이 수없이 많았다. 살아 돌아간 적병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거란군은 지금까지 그토록 비참한 패배를 당해 본 예가 없었다. 귀주대첩의 역사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 고려 시대 부흥 만들다.

거란군을 거의 섬멸했다는 보고를 받은 현종은 몹시 기뻐했다. 왕위에 오르고 두 번이나 거란으로부터 대규모 침략을 받은 터에 얻는 귀한 승전보였기 때문이었다.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은 왕의 이런 예우와 찬양에도 흔들리지 않고 전쟁을 마친 장군으로서의 의무를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1030년(현종 21)에는 고려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에 임명되기도 했던 강감찬은 1032년(덕종 1) 84세로 생을 마감했다.고려는 10만의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의 귀주대첩 이후 대외적으로 위상을 인정받아 거란과 화친을 맺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진이나 말갈 등의 변방 세력과도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또한 국방의 안녕을 바탕으로 내적으로도 안정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 이것이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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