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공부

발해 건국 시조 대조영 업적 알아보자

불고 또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바닐라 삼촌 2022. 10. 25.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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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건국 시조 대조영 알아보기

발해 건국 시조 대조영은 고왕이라고 한다. 고구려의 유민으로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698년 동모산을 도읍으로 한 진국을 세웠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혼란하던 중 이를 기회로 삼아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했다. 당군 대가 이를 알아채고 추격해오자 적군을 천문령의 밀림에 둘러싸인 산악지대로 유인해 크게 격파했다. 이전 투로 당 역시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건국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게 됐다. 713년 최흔에 의해 발해군왕으로 봉해졌고 국호를 진국에서 발해국으로 고쳤다. 발해 건국 시조 대조영의 업적을 알아보자.

발해 건국 시조 대조영 주변정세 알아보자.

668년에 당나라는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사실상 당이 장악한 곳은 요동 일대에 불과했고, 압록강 상류와 동북 만주지방에는 여전히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 고종은 고구려가 망한 그해 12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고자 했고, 아울러 고구려의 잔여세력을 강제로 분산시켜 거세하는 사민 정책을 강행하여 고구려 유민 3만여 호를 요하 서쪽인 당의 영주 지방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 3만 호 중에 발해 건국 시조 대조영의 일가도 끼어 있었다.

발해 건국 시조 대조영 전투업적 알아보자.

발해 건국 시조 대조영은 이와 같은 당나라 동북 정책의 혼란과 이진충의 반란을 기회로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그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했다. 이에 당황한 당의 측천무후는 회유책으로 이전의 행동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대조영에게는 진국 공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을 봉하여 다시 복속시키려 했다. 그러 나이를 거부당하자 당은 추격군을 파견했다.

 

거란족 출신 장군인 이해고가 이끈 당 군사가 공격해오자 말갈족이 먼저 교전했으나 대패했으며, 걸사비우도 전사했다. 발해 건국 시조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 군대의 예봉을 피해 동으로 이동하면서 한편으로는 흩어진 말갈족을 규합했다. 당 군대가 계속 추격해오자, 대조영은 지금의 훈허 강과 휘발 하 분수령인 장령자 부근에 있는 천문령의 밀림에 둘러싸인 산악지대로 유인하여 크게 격파했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당 군대는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이해고는 겨우 몸을 피해 되돌아갔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대조영으로 하여금 발해 건국의 지도자가 되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천문령 전투에서의 승리와 함께 발해 건국의 객관적 정세를 형성한 것이었다.

발해 건국 시조 대조영 건국과정 알아보자

천문령 전투 후, 발해 건국 시조 대조영은 동모산에 진국을 세우고 자립하자 곧 돌궐과 손을 잡았다. 돌궐과 손을 잡음으로써 당시 동북아시아에서의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났고, 당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던 돌궐을 통해 당의 침략 야욕을 막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당으로서는 대조영의 자립을 기정 사실화할 수밖에 없게 되자, 무력으로 적대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이에 당 중종은 회유책의 일환으로 705년 시어사 장행급을 보내어 화해를 청하였다. 이에 양국 간의 화해가 성립되어 대조영의 둘째 아들 대문 예가 당의 수도에 가서 입시하게 되었으며, 당과의 평화적 외교의 기틀이 잡혔다.

 

당과의 화해는 발해 건국 시조 대조영으로서도 호전적인 유목민족인 돌궐과의 불안한 동맹에서 벗어나 왕국의 영속성을 찾고 발전된 당의 문화 유입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후 당에서는 대조영을 곧 책립 하려 하였으나, 거란 돌궐의 침구가 잦아 진국과의 교통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713년 당 예종 최흔이 해로를 통해 요동반도의 뤼순에 상륙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하였다. 이에 대조영은 곧 국호를 진국에서 발해국으로 고쳤다. 719년 대조영이 죽자 그의 아들 대무예(무왕)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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