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공부

우리 민족 최초 여왕 선덕 알아보자

불고 또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바닐라 삼촌 2022. 10. 28.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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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여왕 선덕 일생 알아보자.

우리 민족사 최초 여왕 선덕은 재위 내내 강성한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에 시달렸지만 첨성대와 함께 황룡사 9층 탑, 영묘사 등을 건립하여 불교를 진흥시켰으며 김춘추, 김유신 같은 뛰어난 인재들을 양성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그의 일생을 알아보자.

최초 여왕 선덕 여왕이 된 사연을 알아보자.

최초 여왕 선덕은 신라의 제27대 국왕으로 이름은 덕만이다.신라는 본래 골품제에 따라 외부의 혈통이 전혀 섞이지 않은 성골들만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 무렵에는 성골 출신의 남자들이 계속 줄어들어 근친혼으로 간신히 대를 이어가고 있었다. 《삼국유사》에서는 당시 김 씨 성골의 남자가 남아있지 않아 여왕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이 성골로서는 최후의 남자였음을 알 수 있다.

최초 여왕 선덕 불교 발전을 알아보자.

최초 여왕 선덕은 즉위하였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군사적 압박에 힘들어 했다그것을 이 기기 위해 633년 1월, 선덕여왕은 신궁에 제사 지내고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여러 주군의 조세를 1년 동안 감해 주었다. 이듬해인 634년 1월부터는 인평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며, 분황사가 완성되자 대대적인 불사를 벌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635년에 영묘사가 완성되자 최초 여왕 선덕은 이찬 수품과 용수를 각처에 보내 민심을 다독였다. 분황사와 세계 최초의 천문대인 첨성대,황룡사 구층 목탑을 건립했다.황룡사 구층 목탑의각 층은 신라를 위협하던 주변 국가와 민족을 의미하며,구층 목탑 건립을 통해 부처님의 힘으로 주변 세력을 제압하고자하였다.

최초 여왕 선덕 이웃나라에 시달리다.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인해 국가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최초 여왕 선덕은 강대국인 당나라에 의지하여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다. 640년에 귀족 자제들을 선발하여 당나라의 국자감에 유학 보냈고, 642년 정월에는 조공을 바치는 등 외교적인 노력을 강화했다. 그해 7월 백제가 고구려와 손잡고 대거 군사를 동원하여 서쪽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급기야 당나라와의 외교 거점이었던 당항성까지 함락 위기에 몰리자 신라는 급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 결과 11월에 백제의 장군 윤충이 군사 요충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김춘추의 사위인 성주 품석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동맹을 요청했지만 실패했다.

최초 여왕 선덕 아쉬운 죽음을 맞이하다.

647년 1월, 최초 여왕 선덕이 병석에 누웠는데 갑자기 상세가 위독해지자 성골인 사촌동생 진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자 상대등 비담이 염종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김유신이 김춘추와 함께 어렵게 진압에 성공했다. 그 뒤로 양측의 대치상태가 지속되던 1월 8일, 선덕여왕이 마침내 병고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그녀는 신하들에게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 장사 지내도록 하라. 이는 낭산 남쪽에 있다.”라고 일렀다. 신하들이 그 말에 따라 여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 지냈다. 679년 문무왕 대에 이르러 그녀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를 세우자 사람들은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는 불경의 내용이 실현되었다며 그녀의 예지력에 탄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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