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공부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 진실 알아보기

불고 또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바닐라 삼촌 2022. 9. 30.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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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 누구인가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백제 31대 왕으로 나당연합군에 패해 백제의 멸망을 맞은 마지막 왕이다. 의자왕은 즉위 초에는 왕권강화에 노력했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견제하는 대외정책을 폈으나, 말년의 무절제한 생활로 지배체제 균열을 초래하면서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멸망을 맞았다.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 진실 알아보자.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 생애 알아보자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무왕(武王)의 맏아들로 태어나 무왕 33년(632)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隆)이 615년 태어난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의자왕은 적어도 590년대 중반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641년 무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따라서 왕에 즉위할 당시 나이는 적어도 40대 중반이 넘은 완숙한 나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 정치 업적 알아보자

즉위한 뒤 무왕대에 다져진 기반 위에서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 변혁을 단행했다. 니혼쇼키에 의하면 동생의 아들 교기를 비롯하여 모매 여자 4명과 내 좌평 기미 등 귀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했다. 이는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을 유지하려는 세력을 제거한 조치로 짐작된다. 654년(의자왕 14)에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리하고, 657년에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식읍을 준 조치 등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 친고구려 정책 알아보자

백제 마직막 임금 의자왕이 친고구려 정책을 추진한 것은 중국 대륙에서의 통일 제국의 출현과 관련이 있다. 분열된 중국은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나 통일 왕조인 수, 당(隋;唐)은 이웃 나라에 복속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주변 나라는 수, 당에 복속하느냐 아니면 자주적인 노선을 견지하느냐 하는 선택에 직면한 것이다. 고구려는 이에 반발하여 수와 전쟁을 하였고, 당이 들어서자 화친(和親)을 청하는 등 국면을 타개하려 하였으나 여전히 당의 압박은 거세졌다. 이러한 시기에 집권한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당의 팽창주의(膨脹主義)가 한반도의 평화에 위협이 되고 고구려가 백제를 막아줄 수 있는 방파제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해 친고구려 정책을 취한 것이다.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 사상 알아보자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유교(儒敎)를 통해 집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의자라는 이름 자체가 유교적 색채가 짙으며, 성충(成忠)의직(義直) 윤충(允忠) 등 신하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집권 초기에 주군(州郡)을 순무(巡撫)하거나 죄수를 사면한 것도 유교에서 말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와 통한다. 따라서 의자왕은 친정체제를 강화하면서 유교적 정치를 지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 오해를 알아보자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계 고려 유학자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본기 에는 의자왕이 삼천 궁녀와 놀아나다 나라를 망친 인물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그 삼천 궁녀라는 말은 삼국 시대를 다룬 어떤 역사책에도 없다. 한때 해동증자로 불리며 현명했던 의자왕이 연회 몇 번 베풀었다고 나라가 망했을까? 신라 입장에서는 백제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필요했던 것이고,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이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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