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공부

한국 위인 신라 장군 김유신 업적 찾아보자

불고 또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바닐라 삼촌 2022. 9. 30.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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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장군 김유신 업적 알아보자

신라 장군 김유신은 덕과 지혜, 용맹을 모두 갖춘 명장이다. 신라의 명장으로 금관가야에서 망명한 왕족 출신으로 신라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당나라 소정방의 군대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키고, 숱한 실패 끝에 고구려 정벌에도 성공함으로써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된다. 이후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삼국 통일의 위업 달성하였다. 신라 장군 김유신 업적을 알아보자.

신라 장군 김유신 가족관계 알아보자

신라 장군 김유신은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실의 후손으로 본관은 김해.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532년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아버지는 대량주도독을 지낸 서현이다. 어머니는 지증왕의 증손녀이자 갈문왕 입종의 손녀인 숙흘종의 딸 만 명이다. 김춘추와 결혼한 문명왕후가 그의 누이동생이다. 신라에 투항한 가야 왕족이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기는 했으나, 왕족과 혼인할 수준의 귀족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신라 장군 김유신의 집안은 신라의 귀족들 가운데에서도 권력의 정점에서 멀어진 소외된 계층으로 전락했다.그러나 신라의 통일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워 당시 신라에 귀화한 가야왕족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신라 장군 김유신 정치 인생 알아보자

647년은 신라 장군 김유신에게 분수령이 된 해였다.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여왕은 정치를 잘할 수 없다. 라고 주장하며 명활성을 거점으로 월성의 왕족 세력을 공격한 것이다. 이른바 비담의 난이 일어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당시 흉조로 여겨지던 유성이 월성 쪽으로 떨어지자 왕실 군의 사기는 위축된 반면, 반란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김유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덕여왕과 귀족들을 독려해 반란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다. 이로써 그는 가야계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김유신의 정치적 비중은 무열왕이 즉위한 이후 더욱 높아졌다. 대각간이라는 관직을 받은 것만 해도 그렇다. 신라의 관등은 상위 17등 관계와 그 위에 상대등, 각 간직 이 있다. 대각간은 그 상대등과 각간 위의 직에 내린 벼슬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660년 백제를 정복한 장군들에게 논공행상할 때 김유신에게는 특히 공로가 많다며 대각간이라는 벼슬을 새로 만들어 내렸다고 한다. 훗날 신라 장군 김유신은 삼국 통일의 공로를 인정받아한 단계 더 높은 태대각간이 되기도 했다.

신라 장군 김유신 전투 업적 알아보자

신라 장군 김유신은 어린 시절부터 심신을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해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를 이끌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이때부터 김유신은 남다른 기개로 삼국통일을 꿈꾸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김유신은 무인으로서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해 전공을 세우면서 스스로 입지를 다져갔다. 특히 그의 나이 34세가 되던 629년(진평왕 51)에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낭비성을 함락하는 전공을 세워 크게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648년 백제에게 뺏긴 대야성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 지난 번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김춘추의 딸과 사위의 원수를 갚고자 함이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백제 장군 8명을 생포하고 1,000명에 이르는 백제군을 섬멸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신라 장군 김유신은 백제 장군 8명을 적진에 묻혀 있는 김품석과 고타소의 유골과 맞교환해 김춘추의 한을 풀어 주었다. 또한 승세를 몰아 백제의 악성 등 12성을 함락시키고, 그 공으로 이찬과 상주행군대총관의 지위를 얻었다. 이어 진례 등 9성을 공격해 승리를 거뒀다. 이듬해에는 신라의 석토성 등 7성을 침략한 백제군을 물리쳤다.

신라 장군 김유신 백제와 전투 업적 알아보자

660년, 상대등의 자리에 앉은 김유신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백제 정벌에 나섰다. 그는 의자왕의 실정이 극에 달해 백제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태종 무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당나라에 직접 찾아가 원병을 요청한 이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관계가 형성되어 있던 것도 백제와의 전쟁을 일으키는 데 자신감을 더해 주었다. 신라 장군 김유신은 5만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사비성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황산벌을 향해 돌격했다. 김유신의 부대는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이 이끄는 결사대를 만나 고전했다. 그러나 어린 화랑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백제의 마지막 전선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신라 장군 김유신 당나라와 전투 업적 알아보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두고, 고구려 땅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심지어 신라 본토에 계림 도독부를 두어 삼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당의 침략행위에 대한 투쟁에서도 신라 장군 김유신은 지도적 역할을 했다. 아들 원술이 당군에게 패배하고 돌아오자 참수할 것을 주장하여 결전의 의지를 보였으며, 672년 석문 벌판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에게 패배하고 있을 때 문무왕에게 전략을 자문하기도 했다. 결국 신라군은 그가 죽은 뒤인 676년 당의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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