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공부

고구려 제19대 터프가이 광개토대왕 업적 공부하자

불고 또불어도 쓰러지지 않는 바닐라 삼촌 2022. 9. 22.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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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터프가이 광개토대왕 업적 알아보자

터프가이 광개토대왕 고구려 19대 왕(재위 391~412년).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최초로 연호를 사용했다. 연호는 영락으로 재위 시에 영락 대왕이라고 불렸다. 동부여를 정벌하고 남쪽으로는 한강선까지 진출, 서쪽으로는 후연을 격파하고 랴오둥 지역을 확보했다. 터프가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자세히 배워보자.

터프가이 광개토대왕 백제 업적 알아보자

터프가이 광개토대왕 396년에는 직접 수군을 거느리고 한강 이북의 백제 성 58곳과 촌락 700곳을 공략했다. 고구려군은 위례성까지 포위하여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그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붙잡기도 했다. 이것으로 한강 이북과 예성강 동쪽 지역이 광개토대왕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백제는 왜를 내세워 399년 고구려와 동맹 관계에 있던 신라를 공격했고, 5년 뒤에는 고구려의 대방 고지까지 침략했지만, 터프가이 광개토대왕의 군대에 가야 지역까지 추격당했다. 광개토대왕은 대방 고지에 침입한 왜를 몰아내고 407년, 백제의 6성을 함락시켜 응징했다.

터프가이 광개토대왕 신라 업적 알아보자

신라와는 친선 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400년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에 원군 5만 명을 보내 격퇴시켰고, 이후 신라를 속국으로 삼아 담보물로 인질을 보내게 하고 하슬라(지금의 강릉) 지방을 경계로 삼았다. 터프가이 광개토대왕이 신라와는 우호관계에 있었다.

터프가이 광개토대왕 후연 업적 알아보자

고구려의 서쪽에는 모용씨의 후연국이 있었다. 양국은 사절을 파견하는 등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이는 4년 만에 파탄을 맞는다. 후연의 새 왕인 모용 성이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침략한 것이다. 터프가이 광개토대왕은 2년 뒤인 402년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했고, 404년에는 후연을 공격했다. 이를 통해 터프가이 광개토대왕은 랴오둥 성을 비롯한 랴오허 동쪽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후연의 모용희가 405년 랴오둥 성을 침략했지만 모두 물리치고 국경을 튼튼히 했다. 산둥성에 중심을 둔 남연 왕 모용초에게 천리마를 선물하는 등 후연을 견제하기 위해 외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터프가이 광개토대왕 거란 업적 알아보자

터프가이 광개토대왕 북쪽으로는 거란을 정벌해 500명을 사로잡고, 볼모로 있던 고구려인 1만 명을 풀어 주었다.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로 추정되는 비려를 공격해 부락을 격파하고 숱한 가축을 전리품으로 확보했다고 전해지며,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해 64개의 성을 빼앗아 동부여를 고구려의 세력권 아래로 편입시켰다. 터프가이 광개토대왕은 북으로는 동부여, 남으로는 한강까지 진출했고, 서쪽으로는 랴오허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이 되었다.

터프가이 광개토대왕 내치 업적 알아보자

터프가이 광개토대왕의 업적 가운데 눈여겨볼 것은 내정을 정비하는 데에도 정력을 쏟았다는 것이다. 그는 장사, 사마, 참군 같은 중앙 관직을 신설했고, 왕릉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수묘인 제도를 재정비했다.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어 불교를 장려해 훗날 장수왕이 단행할 평양 천도의 발판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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